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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6. 첫 번째 피(Premier Sang)인문학 2025. 6. 22. 09:57728x90반응형
1. 개요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어 작가 “아멜리 노통브”(Amélie Nothomb 1967~)는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일본, 중국, 미국 등에서 성장하며 경계 없는 정체성을 체화했습니다. 어린 시절 5살 때는 신이 되고 싶었고 7살 때는 순교자가 되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강렬한 내적 세계를 가진 소녀였습니다. 이러한 초월적 욕망은 후일 그녀의 작품에서 신화적 상상력과 실존적 탐구로 발현되며 특히 일본에서의 경험은 문학의 핵심 원천이 되었습니다. 20대 초반 일본 기업에서 겪은 1년간의 파격적인 체험은 ‘두려움과 떨림’(1999)으로 탄생해 "르노도상"(Renaudot Prize)을 수상합니다.
1-1. 노통브 문학의 3대 특징
1-1-1. 아르셰(archee)의 미학
"아르셰"는 "화살이 날아가는 순간의 팽팽한 에너지"를 의미하며 이 개념은 그녀의 글쓰기에 완벽히 적용됩니다. 그녀의 문장은 활시위처럼 팽팽하며 독자를 "무한을 향한 비약"으로 이끕니다. ‘두려움과 떨림’의 마지막 문장 "창문이 존재하는 한 자유는 가능하다"라는 선언처럼 그녀의 글은 저항의 화살이자 희망의 탄생입니다.
1-1-2. 팩션(Faction)의 실험
그녀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립니다. ‘왕자의 특권’은 실제 사건을 소설화했으며 그녀는 "소설 속 사건들은 모두 실제 경험에서 비롯됐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현실에 대한 문학적 탐사를 가능케 하며 독자로 하여금 "진실이란 무엇인가"를 묻도록 자극합니다.
1-1-3. 여성 정체성의 해체
일본 기업에서 경험한 성차별은 “노통브” 문학의 중요한 축입니다. ‘두려움과 떨림’에서 “후부키” 상사의 "웃으면 품위를 잃는다"는 경고는 일본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억압적 규범을 폭로합니다. 그녀는 이러한 감정 통제 요구가 여성의 내면을 파괴한다고 경고하며 작품을 통해 가부장적 구조에 저항합니다.
1-2. 살아있는 전설
그녀는 매년 한 권씩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는 살아 있는 전설입니다. 그녀의 작품은 단순한 자전적 이야기를 넘어 현대인의 정체성 위기를 조명하며 특히 SNS 시대에 만연한 "가면 증후군"을 예리하게 예측했다는 점에서 ‘왕자의 특권’은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마지막 페이지의 하얀 여백은 내가 정복한 순수한 가능성의 공간이다"라는 문장은 글쓰기를 자유의 확보로 정의하는 그녀의 문학관을 응축합니다. 경직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창문을 열어젖히고자 했던 ‘두려움과 떨림’의 “아멜리”, 신분을 버리고 새 삶을 창조했던 ‘왕자의 특권’의 “바티스트”—이들은 모두 "아르셰"의 정신으로 삶을 화살처럼 쏘아 올립니다.
1-3. 대표작으로 보는 노통브 문학의 핵심
1-3-1. 두려움과 떨림(Stupeur et tremblements 1999)
"미스터 하네다는 미스터 오모치의 상사였고, 미스터 오모치는 미스터 사이토의, 미스터 사이토는 미스 모리의, 미스 모리는 나의 상사였다. 유미모토사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지시 아래 있었다." 이 도입부는 성경 마태복음의 족보 기록을 패러디하며 일본 기업의 수직적 구조를 풍자합니다. “아멜리”(작가의 분신)는 탁월한 언어 능력에도 불구하고 차 따르기, 문서 복사 등 의미 없는 업무로 내몰리며 "인간성 말살 시스템"을 경험합니다. 특히 화장실 청소로 전락하는 비극적 에피소드는 조직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44층 창가에서 "세상사람 누구나 자신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라는 깨달음으로 정신적 구원을 찾습니다.
1-3-2. 왕자의 특권(Le Fait du prince 2008)
주인공 “바티스트”는 밋밋한 프랑스인에서 스칸디나비아 귀족으로 신분을 위조합니다. 이 과정에서 “노통브”는 "모든 사람은 타인이 되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본능적 욕망을 탐구합니다. “바티스트”의 대사 "내가 관심 없는 것은 내가 아니다"는 자아의 불안정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작가는 신분 도용을 통해 사회적 정체성과 내적 정체성의 괴리를 날카롭게 해부합니다.
1-3-3. 살인자의 건강법(Hygiène de l'assassin 1992)
“노통브”의 첫 번째 소설로 은둔형 천재 작가 “프레텍스타”와 기자들의 인터뷰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언어의 검투장을 연상시킵니다. “프레텍스타”의 독설적 대사들은 문학이 가진 해체적 힘을 보여주며 “노통브” 특유의 신랄한 유머와 철학적 질문이 압축된 작품으로 그녀가 "기발한 상상력으로 독창적 문체를 창조한다"라는 평판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내용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아멜리 노통브”는 아버지 “파트리크”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이 불가능한 이별이 문학으로 승화된 결과물이 바로 이 소설로 “르노도상” 수상작이자 전 세계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이 작품은 작가의 30여 작품 중 "노통브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아버지의 생애를 통해 삶과 죽음, 용기에 대한 탐구를 그립니다. 특히 이 소설은 단순한 전기가 아닌 1인칭 시점으로 아버지가 되어 쓴 헌사라는 점에서 혁신적입니다. “노통브”는 "아버지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어 쓴다"는 방식을 선택하며 문학적 변신을 완성했습니다.
2-1. 줄거리
1964년 콩고 인질극의 와중에 벨기에 외교관 “파트리크 노통브”는 1,500명의 인질을 구하려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열두 자루의 총구 앞에 서게 됩니다 이 치명적인 순간 그는 삶의 전환점들을 회상합니다.
2-1-1. 유년기의 상처
생후 8개월 때 광산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슬픔에 잠긴 어머니에게 버려진 채 할머니 손에서 자란 파트리크. 할머니는 그를 소녀처럼 옷 입히며 유약하게 키웠습니다.
2-1-2. 가문의 시험
남성다움을 강요하는 할아버지에 의해 “노통브” 가문의 성에 보내진 그는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도 황야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며 생명력의 씨앗을 키웠습니다.
2-1-3. 사랑의 각성
어머니에 대한 집착적 사랑이 깨진 후 우연히 만난 여성에게서 진정한 연대를 배웠다는 점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2-2. 작품적 특이성
2-2-1. 잔혹성과 유머의 화해
‘살인자의 건강법’의 신랄한 풍자나 ‘두려움과 떨림’의 냉소를 버리고 애정 어린 관찰자의 시선으로 아버지의 취약함까지 포용합니다. 특히 굶주리는 가족 앞에서 혼자 배불리 먹는 시지프스(Sisyphe)적 증조부의 모습은 잔혹하면서도 코미디 같은 아이러니를 빚어냅니다.
2-2-2. 역사와 허구의 경계 허물기
1964년 실제 콩고 인질 사건을 배경으로 외교관으로서의 “파트리크”의 경험을 생생하게 재구성하면서도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내밀한 고백들은 팩션(faction) 장르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2-2-3. 여성 작가의 남성 서사 정복
여성 작가가 아버지의 남성적 정체성(유년기의 연약함, 성장의 갈등, 직업적 고뇌 등)을 1인칭으로 쓰며 성공한 사례는 문학사에서도 드뭅니다. 이는 젠더 경계를 초월한 공감의 힘을 증명합니다.
2-3. 콩고 인질극의 진실
1964년 콩고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사건은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질극 중 하나였습니다. 반군에게 붙잡힌 “파트리크”는 단순한 인질이 아닌 협상가로서 1,500명의 생명을 구하려 분투했으나 결국 자신도 총살대 앞에 섭니다. “노통브”는 이 역사적 트라우마를 통해 식민주의의 잔혹성보다 한 인간의 생애에 집중함으로써 보편적 인간애를 조명합니다.
2-4. 한국 독자를 위한 특별 포커스
번역가 “이 상해”의 노련한 솜씨가 돋보입니다. 프랑스 문학 번역상을 수상한 그녀는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 1947~)의 ‘11분’ 등 20여 권의 역작을 번역해 왔습니다. 2024년 12월 5일 국내 출간된 ‘첫 번째 피’는 종이책과 전자책(EPUB)으로 동시 제공되며 초판에는 “서울 신문”, “한겨레” 선정 주간 추천 도서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3. 결론
"나는 살아 있고,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얼마나? 2분, 두 시간, 50년? 그건 중요하지 않다." 작품 속 이 문장은 팬데믹 시대 생명의 취약함을 경험한 우리 모두에게 울림을 줍니다. ‘첫 번째 피’는 단순한 유작이 아닙니다. 총구 앞에서도 현재를 사랑한 한 인간의 기록이자 상실을 딛고 일어서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문학적 위로입니다. “노통브”는 독자들에게 "당신은 얼마나 팽팽한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가?"라고 묻는데 그 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그녀의 문학을 읽는 이유일 것입니다.
"글쓰기는 죽음에 맞서 기억을 영생시키는
최후의 저항이다."(아멜리 노통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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