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761. 문명: 예술 과학 철학 그리고 인간(Civilisation: A Personal View)
    인문학 2025. 7. 9. 11:38
    728x90
    반응형

    1. 개요

     

    영국 미술사의 거장이자 대중 예술 해설의 선구자인 “케네스 매켄지 클라크”(Kenneth Mackenzie Clark 1903-1983)는 예술은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공통 언어라고 믿은 인물이며 30세에 영국 내셔널 갤러리 최연소 관장이 되고 BBC 다큐멘터리 ‘문명’(Civilisation)을 통해 예술 해설의 새 장을 연 그의 여정은 예술이 엘리트주의를 넘어 대중과 소통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1-1. 예술에 눈뜨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이 맞다면 “클라크”의 예술사랑은 일곱 살 무렵 시작되었는데 1910년 런던에서 열린 일본 미술 전시회를 관람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말문이 막힐 정도로 기쁨에 차 새 세계에 발을 들였다"라고 회고했습니다. 부유한 스코틀랜드 섬유업 가문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고독하게 보냈지만 그림 재배열을 즐기고 산책하며 스스로에게 말하는 습관을 키웠는데 이는 훗날 방송인으로서의 탁월한 설득력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윈체스터 칼리지 시절 교장 “몬태규 렌들”(Montague Rendall)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에 매료되었으며 특히 학교 도서관에서 접한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의 저서는 예술이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후 옥스퍼드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던 중 미술사학자 “로저 프라이”(Roger Fry 1866~1934)의 강연을 듣고 “폴 세잔”을 비롯한 현대 미술에 대한 안목을 키웠습니다. 그의 진정한 교육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는데 미술 비평의 거장 “버나드 베렌슨”(Bernard Berenson 1865~1959) 밑에서 2년간 수학하며 르네상스 드로잉 연구에 깊이 빠져들었고 이 경험은 그의 학문적 초석이 되었습니다.

     

    1-2. 미술관 혁명

    “클라크”의 경력은 이례적인 기록으로 가득합니다. 27세에 옥스퍼드 “애시몰린 미술관” 관장으로 취임한 그는 당시 천시되던 빅토리아 시대 미술의 가치를 인정해 '위대한 책장‘(Great Bookcase)을 구입하는 진보적 안목을 보였는데 이 작품은 2016년이 되어서야 전시되었습니다. 1934년 30세의 나이로 “영국 내셔널 갤러리” 관장에 임명되었을 때는 스스로 "대형 백화점 관리인이자 상류층 전속 엔터테이너가 될 것"이라고 자조하기도 했습니다.

    1-2-1. 대중 개방 정책

    당시 위엄만 있던 미술관을 모든 계층이 편안히 찾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전시 해설을 강화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해 "러스킨“의 이상을 현실로 구현했습니다.

    1-2-2. 전시 전략

    1930년 로얄 아카데미에서 개최한 '치마부에(Cimabue 1240~1302경)에서 세간티니(Giovanni Segantini 1858~1899)까지' 전시회는 이탈리아 미술 600년 사를 조명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나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 정권이 프로파간다로 이용한 점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1-2-3. 전쟁 속 예술 저항

    제2차 세계대전 중 작품을 안전한 장소로 옮긴 후 텅 빈 갤러리에서 1,700회 이상의 콘서트 개최한 것은 런던 대공습 시기 시민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제공한 문화적 저항이었습니다.

     

    1-3. 예술의 대중화

    1950년대 “클라크”는 놀라운 전환을 시도합니다. 최초의 상업 TV 방송사 “ITA”(Independent Television Authority) 초대 의장직을 수락하였는데 순수 예술계 인사에게는 배신으로 비칠 수 있는 행보였으나 그는 대중 매체가 예술 교육에 혁명적 역할을 할 것이라 확신했으며 이 경험은 1969년 역사적인 BBC 다큐멘터리 ‘문명’ 제작으로 이어졌습니다. ‘문명’은 암흑기부터 20세기까지 서구 예술 1,000년 사를 종횡무진 누비는 대서사시로 “클라크”는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게 걸으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설명하거나 피렌체 성당 돔을 배경으로 인문주의 정신을 설파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영국은 물론 미국, 호주 등 60여 개국에 방영되며 전 세계적 현상이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은 독백의 연장이라고 말한 그의 통찰이 빛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역사적 맥락이 지나치게 단순화됐다"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1-4. 글쓰기와 유산

    클라크는 방송인 이전에 탁월한 저술가였습니다. 그의 글은 학문적 깊이와 대중적 접근성을 동시에 추구했습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1939)는 윈저성 소장 드로잉을 분석한 역작으로 "가장 깊이 있고 학문적인 업적"으로 평가받습니다. ‘나체’(The Nude 1955)는 "예술에서의 나체는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형태에 대한 아이디어"라는 명제로 서양 미술의 근본적 주제를 해석했습니다. “클라크”는 생전에 영국 문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혔는데 35세에 기사작위(KCB)를 수여받는 등 젊은 나이에 영예를 누렸고 ‘문명’ 방영 직전인 1969년에는 종신귀족에 서임되었습니다. 1983년 타계 후에도 그의 영향력은 지속되었습니다. 2014년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은 새로운 세대가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평가는 복잡합니다. 감정실수로 작품 위작 논란에 휩싸인 적도 있었고 ‘문명’이 서구 중심적 관점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비판도 제기됩니다. 하지만 예술을 대중의 마음속으로 옮겨놓은 해설자로서의 역할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음악회를 열고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을 전한 그의 열정은 예술은 인간 존엄성의 증거라는 신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예술 해석의 권위가 학자에게만 있지 않음을 증명했습니다. “클라크”의 진정한 유산은 화려한 타이틀이 아닌 일상의 언어로 예술의 불꽃을 전한 통역자로서의 사명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박물관에서 듣는 오디오 가이드, 유튜브 예술 강의, 인스타그램 미술 해설까지 모든 것은 그가 세운 이해 가능한 예술의 거대한 다리 위에 서 있습니다.

    2. 내용

     

    1969년 영국 BBC는 컬러 TV 시대를 열기 위해 야심차게 13부작 다큐멘터리 ‘Civilisation: A Personal View’를 제작했는데 이 시리즈의 각본을 확장해 탄생한 책이 바로 “케네스 클라크”의 ‘문명’으로 359페이지에 달하는 이 저작은 286점의 흑백·컬러 삽화를 수록하며 9세기 아이오나 섬의 켈트 십자가부터 20세기 뉴욕의 마천루까지 서구 문명 1000년의 여정을 종횡무진 누빕니다. 그는 "문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추상적 정의는 못 하겠지만 본 순간 알 수 있다"라고 답하며 독자들을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아래로, 르네상스 화실 안으로, 계몽주의 살롱으로 안내합니다.

     

    2-1. 문명의 자화상

    ‘치마부에에서 세간티니까지’ 이탈리아 미술 600년을 조명한 1930년 전시회를 기획했던 “클라크”는 이 책에서 더욱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줍니다. 그는 플로렌스, 우르비노, 암스테르담 등 13개국 100여 개 장소에서 촬영한 영상의 풍부한 시각 자료를 텍스트와 결합해 "문명의 자화상"을 완성했는데 특히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의 ‘갈라테이아의 승리’(1512)를 분석하며 "고대 사르코파고스 조각의 파편들에서 잃어버린 고대 회화의 정수를 재창조한 라파엘로의 상상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2-2. 클라크의 핵심 명제

    “클라크”는 에피소드 6(항의와 소통)에서 문명의 필수 조건을 명료하게 제시합니다. "지적 에너지, 정신적 자유, 미적 감각, 불멸에 대한 갈망" 이 네 가지가 없으면 문명은 꽃피울 수 없다고 강조한 그는 역사의 전환점마다 등장한 창조적 천재들에 주목합니다. “단테”, “미켈란젤로”, “셰익스피어”, “뉴턴”, “괴테” 같은 이들은 단순히 시대를 초월한 개인이 아니라 "그 시대 정신의 총체적 결실"이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셰익스피어”를 논하며 "이런 규모의 천재를 배출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문명의 정당성 증명"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이 관점은 “클라크”의 평생 신념과 연결되는데 어린 시절 “존 러스킨”의 저서에서 예술은 모든 이의 권리라는 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내셔널 갤러리” 관장 시절 전시 해설 강화와 교육 프로그램 확대로 미술관을 대중에게 개방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런던 대공습 속에서도 텅 빈 갤러리에서 1,700회 이상의 콘서트를 열어 예술이 주는 위안을 증명했습니다.

     

    2-3. 문명의 역설적 진단

    그는 문명의 취약성과 역설을 직시합니다.

    2-3-1. 종교 vs 예술

    12세기 프랑스에서 클뤼니 수도원은 예술 후원의 중심이었으나 동시에 "사치와 권력에 굴복해 영성적 순수성을 잃었다"라고 지적합니다.

    2-3-2. 인본주의의 이면

    르네상스 인본주의가 인간 중심 사상을 꽃피웠지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냉소적 권력 논리를 정당화했습니다.

    2-3-3. 물질주의의 함정

    마지막 장 ‘영웅적 물질주의’(Heroic Materialism)에서 그는 산업혁명 이후 기술 발전이 가져온 인간성 상실을 경고합니다. “W.B.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의 시 ‘재림’의 "우리는 냉소와 환멸로도 폭탄만큼 효과적으로 자기를 파괴할 수 있다"라는 내용을 인용하며 "우리는 자본주의가 낳은 영웅적 물질주의에 매몰됐지만 이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라고 단언합니다.

     

    2-4. 논쟁과 재평가

    ‘문명’은 출간 당시부터 논란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비판은 서구 중심적 시각으로 “클라크”가 이슬람, 아시아 문명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점, 식민주의를 비판하지 않은 점이 지적됐습니다. 2018년 BBC는 이를 의식해 다중 내레이션으로 리메이크한 ‘Civilisations(문명들 복수형)를 제작하며 "문명의 상대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역사적 단순화를 문제 삼았습니다. 13개 에피소드로 방대한 내용을 압축하다 보니 복잡한 역사적 맥락이 생략된 측면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클라크” 자신도 "이해를 위해 과감한 선택이 필요했다"라고 변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문명’의 가치는 여전히 막대합니다. 2024년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의 ‘클라크 회고전’은 그를 20세기 영국 미술계 최고 영향력자로 재조명했습니다. 그의 핵심 공헌은 "예술 해석의 특권을 학계에서 대중에게 넘긴 것"입니다.

     

    3. 결론

     

    반세기가 지난 지금 “클라크”의 마지막 경고는 더욱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소셜 미디어의 분노, 기후 위기, 전쟁의 그림자 속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중심은 무엇인가? 영웅적 물질주의 외에 대안이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 책은 답을 주기보다 질문의 깊이를 일깨웁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인간 존엄성을 대리석에 새겼듯,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이성을 신뢰했듯 “우리 시대의 문명은 어떤 가치로 새겨질까요?” 클라크가 남긴 교훈은 명료한데 "문명은 개인의 천재성과 사회의 도덕적 조건 사이의 균형에서 피어난다."라는 것입니다. 이 책은 위태로운 시대에 인간 정신의 불굴성을 믿게 하는 한 편의 시적 선언이자 영혼의 방주입니다. “클라크”가 보여준 문명의 빛을 이어갈 것인지 아니면 "피로 물든 조류"에 잠길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동은

    인간 정신이 파괴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준다."(케네스 클라크)

    728x90
    반응형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