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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8.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인문학 2025. 5. 2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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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1886년 7월 23세의 미국 청년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는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버몬트 주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다트머스 대학과 유니언 신학교에서 수학한 엘리트였지만 조선 정부의 초청으로 육영공원(**1886년 9월 23일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 공립학교**)의 영어 교사로 부임하며 평생을 한국과 연결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는 이후 63년 동안 한글 연구, 교육 개혁,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그의 묘비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유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한국어 학습 4일 만에 한글의 획기적 우수성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육영공원에서 왕실 자제들을 가르치던 중 “고종”이 한글 발음 표기로 영어 문장을 읽는 모습을 보고 "별도의 발음기호 없이 표음이 가능한 세계 유일의 문자"임을 확신했습니다. 이 경험을 계기로 1889년 한국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하며 한글 보급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한글은 상하 계층의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열쇠"라며 한자 중심 교육을 비판했고 띄어쓰기 체계 도입을 주도해 현대 한글 문법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헐버트”는 “고종”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일본의 침략 의도를 국제사회에 고발했습니다. 특히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활동하며 한국의 독립 의지를 호소했으나 열강의 외면으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 빌미가 되었고 “헐버트”는 1907년 일본에 의해 추방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 10년간 전국 강연을 통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렸습니다. “안 중근” 의사는 1909년 뤼순 감옥에서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라며 그의 공적을 기렸습니다.

     

    그는 단순한 선교사를 넘어 문화 인류학자로서 한국의 가치를 발굴했습니다. 1890년 평양 여행을 계기로 ‘재팬 메일’에 10회 연재 기사를 통해 조선 내륙의 풍경을 최초로 서양에 소개했으며 구전되던 ‘아리랑’을 악보로 기록해 세계 음악사에 등장시켰습니다. 그의 저서 ‘The Passing of Korea’(1906)는 일제의 왜곡된 한국관을 반박하며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민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913년에는 중국에 한자 대신 한글 채택을 제안하는 등 한국어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897년부터 1905년까지 학부 자문관으로 활동하며 근대 교육 제도를 설계했습니다. 제중원(**고종의 명에 의하여 1885년 4월 10일 개원한 최초의 서양식 황립 병원으로 설립 당시 명칭은 광혜원**)학당에서의 과학 교육, “삼문출판사”(Trilingual Press **1890년 미국 감리교회 선교부에 의하여 서울에 설립되었던 출판사 겸 인쇄소**) 운영을 통해 서양 학문을 번역 보급했으며 한영사전 편찬에 참여해 언어 교육의 표준을 정립했습니다. 특히 "교육은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모든 계층을 위한 것"이라는 신념으로 평민 교육 확대에 힘썼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 승만”(1875~1965)과 독립운동가 “신 흥우”(1883~1959)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49년 8월 86세의 “헐버트”는 “이 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광복절 행사 참석을 위해 40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으나 노환으로 인해 입국 7일 만에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독립장(1950)과 금관문화훈장(2014)을 추서 하며 그의 공적을 기렸습니다. 서울시 마포구 소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된 그의 묘소는 현재까지도 한국인들의 추모 장소로 남아있으며 서울 종로구 당주동 소재 “주 시경” 마당 공원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헐버트”의 유산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는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계 각국의 잘못된 한국 정보를 시정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2024년에는 “헐버트”가 1890년 평양 여행 당시 기록한 ‘Korea As Seen From The Saddle’이 재출간되며 당시 조선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는 아리랑 TV를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되었습니다. “호머 헐버트”는 단순한 외국인 관찰자가 아니라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직접 참여한 행동주의 지식인이었으며 그의 삶은 문화적 우월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에 타문화에 대한 진정한 존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오늘날 서울 거리를 걷다 만나는 그의 동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는 헐버트가 사랑한 한국의 가치를 얼마나 지켜내고 있을까?" 역사 속에 잠든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교훈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2. 내용

     

    “호머 베절릴 헐버트”(1863–1949)는 미국 출신 선교사이자 언어학자, 독립운동가로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입니다. 1886년 조선에 도착한 그는 육영공원에서 영어 교사로 시작해 고종 황제의 신뢰를 얻으며 외교 특사로 활동했고,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한국의 목소리를 세계에 전했습니다. 특히 1906년 출간된 이 작품은 당시 한국의 문화, 역사, 정치적 상황을 집약한 역작으로 한국의 독립 정신을 고취하고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을 비판한 내용으로 주목받았으며 단순한 기록을 넘어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현실 참여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2-1. 탄생 배경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던 시기 “헐버트”는 “고종”의 밀명을 받아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친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일본의 한국 침략 의도를 명확히 인지하게 되었고 서양 사회에 한국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집필을 결심했습니다. 1906년 출간된 이 책은 한국의 지리, 역사, 사회 제도, 문화예술, 산업 현황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며 다음과 같은 핵심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인은 온화하고 지적이며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민족이다." “헐버트”는 서문에서 "이 책은 한국의 고통 속에서 쓰였다"며 한국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조명하면서도 일본의 폭정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특히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강조하며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주장해 한국어의 가치를 국제사회에 알렸습니다.

     

    2-2. 책의 주요 내용

    2-2-1. 한글과 문화적 정체성

    “헐버트”는 한글의 창제 원리를 분석하며 "24개의 자모로 모든 발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1889년 ‘사민필지’를 집필하며 한글 교육을 확산시켰고 띄어쓰기 체계를 도입하는 등 한국어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The Passing of Korea’에서도 "한글은 한국인의 지적 역량을 증명한다"라며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시켰습니다.

    2-2-2. 고종 황제와의 깊은 유대

    을미사변(1895) 이후 “헐버트”는 “고종”의 경호원으로 활약하며 밤마다 궁궐을 지켰습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에서는 특사로 파견되어 일본의 침략적 행위를 국제사회에 고발했으나 이는 “고종”의 강제 퇴위로 이어지는 비극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책에서 고종을 "억압받는 군주이자 현명한 개혁가"로 묘사하며 동정적 시각을 드러냈습니다.

    2-2-3. 일제 침략의 비판과 한국 독립의 당위성

    “헐버트”는 일본의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간섭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미국은 한국을 일본에 넘겼다"라고 통탄했습니다. 특히 1910년 한일병합 조약 직후 그는 미국 상원에 ‘What About Korea?’라는 성명서를 제출해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는 등 외교적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2-2-4. 한국 사회에 대한 다층적 기록

    한국의 전통 의식주, 농업 기술, 예술 작품부터 근대화 과정의 어려움까지 상세히 기술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한국의 도자기와 불교 미술을 "동양 예술의 정수"로 평가하며 서양인들의 편견을 반박했습니다.

    2-2-5. 미래에 대한 희망과 경고

    “헐버트”는 한국인에게 "교육과 기술 습득을 통해 자립해야 한다"라고 조언했으며 "일본의 지배는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희망을 전했습니다. 1949년 생애 마지막 방한에서 그는 "통일된 한국의 밝은 미래"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2-3. 역사적 의미와 현대적 교훈

    이 책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닌 식민지 시대 한국의 목소리를 대변한 선언문입니다. “헐버트”는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한국을 주체적 존재로 조명했으며 이는 당시 서구 사회에 극히 이례적인 접근이었습니다. 2014년 한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했으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장된 그의 묘비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길 원한다"는 유언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날 이 책은 한국 근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필수 자료로 평가받으며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문화적 가치를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류의 세계적 확산과 맞물려 “헐버트”가 강조한 한국 문화의 독창성이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3. 결론

     

    “호머 헐버트”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기억되며 그의 저서 ‘The Passing of Korea’는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넘어 한국의 정체성을 수호하려는 열정이 담긴 기록입니다. 21세기 한국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오늘날 우리는 그의 메시지에서 문화적 자긍심과 평화적 외교의 중요성을 다시금 배울 수 있습니다. “헐버트”가 꿈꾼 "통일된 한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그의 정신은 계속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는 것을 더 원한다."(호머 헐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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