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0. 금지된 일기장(Quaderno proibito, Forbidden Notebook)
1. 개요
1911년 로마에서 태어난 “알바 데 세스페데스”(Alba de Céspedes y Bertini 1911~1997)는 쿠바 독립운동의 아버지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 1819~1874)의 손녀로 이탈리아인 어머니와 쿠바인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 두 개의 조국을 가진 정체성으로 평생 독특한 문학적 관점을 형성했는데 특히 여성의 내면 갈등과 사회적 억압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이어졌습니다.
1-1. 파시즘에 맞선 펜의 저항
1935년 첫 소설 ‘타인의 영혼’(L’Anima Degli Altri)을 발표한 직후 그녀는 반파시스트 활동으로 투옥되는데 이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1938년 출간된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Nessuno Torna Indietro’와 1940년 ‘라 푸가’(La Fuga)는 “무솔리니” 정권에 의해 즉시 금서 처리되었고 1943년에는 레지스탕스 라디오 방송 “Radio Partigiana”를 이끌며 “클로린다”(Clorinda)라는 가명으로 저항 메시지를 전파하다 다시 체포됩니다. 전쟁이 그녀의 글쓰기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는데 특히 여성 캐릭터들을 행위의 정당성을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로 형상화한 점에서 혁명적이었습니다.
1-2. 문학사에서 잊힌 여성 저항의 아이콘
1955년 그녀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 1912~2007) 감독의 영화 ‘여자들’(Le Amiche)의 각본을 쓰며 영화계에도 진출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예술 부문 문학 경연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뒤로 점점 문단의 주목에서 멀어졌는데 "비록 그녀의 책이 베스트셀러였음에도 최근 이탈리아 여성 작가 연구에서 그녀는 간과되었다"라는 평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일기장에 쓴 주인공의 운명을 닮았습니다.
1-3. 쿠바 독립의 피가 스민 귀환
1968년 10월 그녀는 할아버지가 1868년 스페인에 맞서 쿠바 독립 전쟁을 선언한 지 100주년 기념식에 초대되었습니다. 만시야니요에서 열린 행사에서 “피델 카스트로”(Fidel Alejandro Castro Ruz 1926~2016)와 나란히 선 모습은 역사의 숨 막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방문에서 그녀는 1871년부터 1874년까지 할아버지가 쓴 편지들을 쿠바 국립기록보관소에 기증하며 혁명의 유전자가 글쓰기로 계승되었음을 증명했습니다.
1-4. 오늘날 그녀를 읽는 이유
2020년대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에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작품은 침묵을 저항으로 전환하는 서사적 전략으로 재조명되며 그녀가 일기장에 투영한 여성의 내적 독백은 SNS 시대 자기표현의 전조였습니다. “Epoca”지에 연재한 조언 칼럼 ‘그녀의 편에서’(Dalla parte di lei)는 현대의 익명 고민 상담의 원형이었습니다. 파시즘에 맞선 펜과 가부장제에 맞선 일기장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금지된 노트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다른 형태로 부활할 뿐이다"라는 경고입니다.
2. 내용
1950년 로마 어느 일요일 아침 43세의 평범한 주부 “발레리아 코사티”는 담배 가게에서 빨간 표지의 공책을 구입하는데 이 간단한 행위는 당시 법으로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책은 단순한 종이가 아닌 가부장제라는 감옥에 갇힌 여성이 탈출을 시도하는 첫 번째 창살 흔들기였습니다.
2-1. 일기장이 폭로한 가정의 허상
“발레리아”는 남편 “미켈레”와 두 성인 자녀(리카르도와 미렐라)와 함께 작은 아파트에서 살며 비서로 일하는 전형적인 전후 이탈리아 중산층 주부입니다. 그녀의 일기는 가정의 평온한 표면 아래 숨겨진 억압의 구조를 낱낱이 드러냅니다. “가족 앞에서는 눈치채지 못한 척해야 해. 아니면 적어도 그 의미를 캐물어선 안 되지.", "이 지속적인 잠든 척, 괴로워하며 깨어있되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연기야말로 모범적인 결혼 이야기를 만드는 비결인 걸까?"라고 되뇌며 ”발레리아“는 자신의 방도, 서랍도 심지어 생각조차 사적인 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녀가 일기장을 숨기려 할 때마다 가족들은 그녀에게 "왜?"라고 묻습니다. "엄마가 무슨 일기를 써?"라는 남편의 질문은 가정 내 그녀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2-2. 세대를 가로지르는 여성의 갈등
“발레리아”의 딸 “미렐라”는 법대생으로 어머니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꿈꿉니다. “미렐라”는 "지금은 나 자신을 존중할 뿐"이라고 선언하며 어머니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가족의 권위만 인정하는 엄마와 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라는 “미렐라”의 말은 모녀간의 가치관 충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내가 스무 살 때는 미켈레와 아이들이 내 운명이자 소명 그 이상이었어. 나는 단지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됐지." 이 갈등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닌 전후 이탈리아 사회의 변화를 반영합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시기 가정과 사회 사이에서 흔들리는 여성들의 정체성 혼란을 “데 세스페데스”는 날카롭게 포착했습니다.
2-3. 가장 위험한 저항 무기인 글쓰기
“발레리아”의 일기장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그것은 억압된 자아의 부활, 침묵의 저항입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 비로소 알게 됐어. 단어나 억양이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들만큼 때론 그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걸", "이 노트를 열 때마다 손이 떨려. 두려워. 비어 있는 하얀 페이지들, 내 미래의 날들을 기록할 빽빽한 선들...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 앞에서 나는 이미 괴로워하고 있어." “데 세스페데스” 자신의 경험은 이 주제에 생생함을 더합니다. 1943년 그녀는 나치를 피해 숲 속에서 은신하며 일기를 썼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독일군이 농가의 남자들만 살해하고 여성들은 살려둔 사건을 기록하며 "구원받을 가능성 자체가 나를 깊이 모욕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그녀에게는 치욕이었습니다.
2-4. 왜 지금인가?
2023년 새로운 영어 번역본이 출간되며 이 작품은 재조명받기 시작했습니다.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 **인문학 포스팅 550번 참조**)는 “데 세스페데스”의 영향을 직접 언급했으며 “뉴요커”는 "70년 전 작품이 오히려 지금 더욱 불타오른다"라고 평했습니다. “발레리아”의 직장인이면서 주부의 역할은 현대 여성들이 겪는 감정 노동을 예견했으며 "가족들을 위해 내 온 존재를 희생했지만 그들은 내가 한 일들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긴다."라는 깨달음은 오늘날에도 통합니다.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현대인들에게 “발레리아”의 일기는 진정한 자기 고백의 원형으로 그녀가 1950년대 잡지 “Epoca”에 연재한 ‘그녀의 편에서’(Dalla parte di lei) 조언 칼럼은 현대의 익명 고민 상담의 시초였습니다. 한국 독자들에게 특히 공감되는 점은 흔들리는 모성의 정직한 기록입니다. “발레리아”가 딸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랑과 질투,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가끔 딸을 마치 소녀 시절 짝사랑처럼 바라본다"라고 고백하는 그녀의 모순된 감정은 한국 드라마 ‘마더’나 ‘82년생 김지영’에서도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3. 결론
“데 세스페데스”는 생전에 베스트셀러 작가였음에도 전후 문학사에서 잊혔는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묘사한 주인공의 운명을 닮았습니다. 그러나 2024년 현재 그녀의 작품은 전 세계에서 재조명받으며 TV 드라마로 제작되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다"라고 그녀는 레지스탕스 라디오에서 선언했는데 이 책은 그 선언의 확장으로 종이 위에 적힌 한 여성의 진실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 보여주는 증거이자 "금지된 일기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다른 형태로 부활할 뿐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원한 고백록입니다.
"우리가 매일 일어나는 가장 작은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비로소 삶의 비밀스러운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몰라." (발레리아 코사티, 금지된 일기장 중에서)